한국인 L 때문에 정말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나에게 예전에 지원했던 미국계 국제학교에서 4월에 시험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내 부모님은 일반적으로 영국보다 미국이 여러 면에서 강하고, 새롭고 좋은 학교에서 많이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이유로 홍콩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에 원서를 낸 것 같다. 당시 나는 부모님께 영국계 학교 생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저 연락이 왔으니 시험 보러 가자는 식이었지만, 나는 정말 어떻게든 이 학교를 빠져나가고픈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L이 없다 해도 한번 잘못 낙인찍히면 그만큼 정상화되기도 힘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러 가면서 나는 아무리 시험이 어렵고 학교가 아무리 명문이라 해도 미국계 학교가 무슨 영재학교는 아니니까 운 좋으면 붙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험을 봤는데, 미국계 학교의 입학시험은 미국 수능인 SAT 정도 수준의 독해, 에세이, 수학과 아이큐테스트 같은 도형문제 등이 있었다. 이 입학시험만 총 4시간정도 본 걸로 기억하는데, 모든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에세이는 한 시간의 시간제한이 주어졌는데, 나는 주어진 두 장의 종이 중 한 장 반밖에 못쓰고, 그마저도 쓰다 만 채로 제출하게 되었고, 수학도 배우지 않은 것도 너무 많이 나왔고, 독해도 어려웠고, 아이큐테스트도 어려웠다. 어려운건 둘째치더라도 나한텐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허무하게 시험을 다 보고 나오면서 난 100% 떨어질 것이라 확신한 채 우울해했다. 당시 무입학시험학교에 다니고 있던 내 친구도 시험을 보고 나와서는 진짜 너무 어려웠다고 투덜댔다. 이래서 미국계 학교에 붙은 학생들을 찾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홍콩에 있는 학생들이라면, 특히 한국 학생들이라면 두 번 이상쯤은 지원해보는 학교가 미국계 학교였다. 그만큼 입소문이 자자했고 교사진 및 학교 커리큘럼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격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시험도 워낙 어려운 데다 티오도 잘 안 나서 아무리 합격해도 1~2년간 waiting이 걸려있어서 결국엔 못 들어가는 학생들도 있었고 다양한 이유의 불합격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에 미국인이나 미국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 또는 학교에 ‘기부’라는 명목으로 돈을 투자한 학생들에 한에서는 시험도 안보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다 채우니 일반 학생들에게 티오는 자연스럽게 거의 안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미국계 학교는 잊어버리고 L도 없어졌겠다 그냥 대충 학교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는데, 한 달 정도 후에 미국계 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내가 waiting 걸렸으니 기다리란다. 나는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 편지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하지만 어차피 waiting pool에 들은 사람 치고 최종합격하는 사람들을 거의 본 경우가 없던 나는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영국계 학교에서 새 학년을 시작하려 준비 중이었던 8월초, 미국계 학교에서 ESOL 프로그램 동의 조건으로 최종 합격 통보를 보내왔고 영어를 처음 배운 것이나 다름없었던 홍콩에서 3년 만에 홍콩을 대표하는 미국계 명문 사립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무입학시험학교에서 영국계학교로, 그리고 영국계학교에서 미국계학교로, 나같이 미국국적도 아니고 영어 배운지도 얼마 안 된 평범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아마 최단 시간 안에 학교를 옮긴 게 아니었나 싶다.